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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용인이야기>(5)샹그릴라 가는길  

<박범신의 용인이야기>(5)샹그릴라 가는길
어버이날 떠오른 삽화 하나.

아마 초등학교 이·삼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양지바른 툇마루에 해바라기하듯 앉아서 양재기에 담긴 콩고물 버무린 밥알을 손으로 주워먹고 있었다. 인절미할 때 쓰려고 준비해둔 콩고물에 밥알을 버무리면 최고의 간식이 됐다.

어머니는 걸레질을 하는 중이었다. 신산했던 삶의 무게에 눌려 늘 어두웠던 어머니의 표정도 그날만은 밝고 다정해보였다. 모처럼 마음이 밝으니 선선히 콩고물에 밥을 버무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엔 콧노래라도 부를듯 환한 표정으로 걸레질을 시작한 어머니의 내부에서, 어느 순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갑자기 나는 날카로운 쇳소리같은 걸 듣는다. 고개를 홱 돌린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거무튀튀한 걸레. 뜻밖에 무릎꿇고 앉아 어머니가 걸레를 쫙쫙 찢어발기고 있다. 얼마나 모질게 힘을 주는지 어머니의 갈퀴같은 손등 위엔 핏줄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올라 있고 번질 번질 생땀이 솟는다.

“이놈의 것… 발기발기… 찢었으면…”

어머니는 아마 이를 갈듯이 중얼거렸을 것이다 ‘이놈의 것’이 걸레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만 콩고물 버무린 밥알이 담긴 양재기를 토방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다. 어머니의 눈에서 내쏘아지는 푸르스름한 인광(燐光) 때문이다. 어머니가 낯설고, 무섭다. 앙, 하고 갈라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입 안에 들어 있던 밥알들이 사방으로 뿜어져나간다.

이것은 내가 어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갖가지 삽화 중에 가장 극적인 것이다. 나는 그날의 선명한 삽화 하나로 어머니가 짊어졌던 삶의 무게를 이해한다. 단지 가난하고 고생스러워서만이 아닌, 맷돌같은 실존의 무게를.

외가는 높은 고개를 넘어가야 되는 산 너머 저쪽에 있었다. 어머니는 열여덟에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어 들동네로 시집을 왔다. 깊은 산골로부터 신작로가 멀지 않은 들동네로 나올 때 어머니는 당신의 삶이 보다 나아지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삶은 길을 따라 흐른다.

시간도 그렇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최초로 진지하게 학습했던 것은 갈라지고 맺어지며 끝없이 뻗어나가는 들길이다. 아니 들길이라기보다 논두렁길이다. 마을에서 초등학교까진 가장 빠른 논두렁길로 2킬로미터. 어머니는 처음에 빠른 길을 학습시켰지만, 길에 익숙해지고나서부터 나는 매양 등교길을 바꾸어 다니곤 했다.

그러므로 등교길은 마음먹기에 따라 2킬로미터가 되기도 하고, 3킬로미터, 또는 4킬로미터가 되기도 했는데,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그 들길은 나에게 다채로운 시행착오의 경험과 함께 상상력을 주었다.

그 다음엔 신작로.

중학교 들어가고부터 나는 신작로를 따라 자전거통학을 했다. 신작로는 곧은 길이자 너르고 빠른 길이다. 맺어지고 갈라지는 것 또한 들길처럼 아기자기하지 않으니 통학길이 지루해도 돌아가거나 할 일은 없었다. 그저 곧은 길을 따라 시행착오도 상상력도 없이 기능적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그나마 중학교 때의 그 신작로가 내게 위로가 되었던 대부분의 것은 자전거의 부드럽게 흐르는 속력 때문에 얻은 것이다. 봄이 되면 때로 신작로가에 핀 수많은 들꽃들을 보았고 여름이면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우는 매미 소리를 들었으며, 가을엔 지평선까지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벼들이 여물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자전거가 아니라 차로 다녔다면 그런 것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차가 있다.

나는 고등학교 때 강경에서 익산까지 기차통학을 했는데, 화물차를 개조해 만든 예전의 통학기차는 창이 몇 되지 않는데다 워낙 좁아서 창 밖의 흐르는 풍경조차 제대로 내다볼 수가 없었다. 기차를 타면 그러니까 매번 화물이 될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과 짐을 한꺼번에 싣고 정해진 곳이 아니면 멈추는 법도 없이 달려가는 기차의 기능성 때문에 누구나 화물이 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즘은 자주 고속도로를 오가고 이따금 비행기도 탄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으니, 들동네에 사는 초등학생조차 등교길의 시행착오는 경험하지 않는다. 세계가 가르쳐주는대로 그들은 가장 빠른 직진의 길을 재빨리 간파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기능성과 효율성은 교과학습으로 높아지는게 아니라 생존의 본능 때문에 높아진다.

오늘의 문화구조 안에서 들길이든 신작로든 철길이든간에 길은 나보다 더 빨리 가는 자와 나보다 뒤처진 자를 품고 있을 뿐이다. 초등학생조차 길가의 봄꽃이나 미루나무는 볼 겨를도 없고 볼 필요도 없다.

길은 근대화과정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우리 어머니가 시집올 때 걸어나왔던 고갯길부터, 내가 생애를 통해 통과해온 들길, 신작로, 철길, 그리고 고속도로까지, 더 넓고 더 빠른 길의 효용성에 따라 생각도 결정된다. 돌아보면 더 넓고 빠른 길만을 쫓아서, 또는 더 넓고 빠른 길로 밀려서 나온 것이, 나의 지난 생애였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길이 넓어지고 빨라지는 것만큼 행복해졌는지는 의문이다. 가끔, 자주 고속도로를 오가고 비행기를 타는 신세가 됐는데도, 나 또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놈의 것… 발기발기… 찢었으면…’하면서 ‘걸레’를 쫙쫙 찢어발기고 싶다. 삶이 넉넉하고 부드러웠다면 왜 손등에서 핏줄이 불거질만큼 힘주어 걸레를 찢겠는가.

이상한 일이다.

용인 ‘한터산방’에 홀로 있으면 멀리, 휘황한 도시의 불빛 아래에서 우리 어머니처럼 ‘걸레’를 쫙쫙 찢어발기고 있는 손, 손들이 더 잘 보인다.

그럴 때 나는 집을 나와 ‘샹그릴라 언덕’에 이르는 구부러진 산길을 걷는다. ‘한터산방’에서 2킬로미터쯤, 굴암산 품 속을 흐르는 숲사잇길을 걷다보면 어떤 지점부터 툭 꺼져내려가는 좁은 비탈이 나오는데, 내 스스로 이름지어 부르기를, 그곳을 ‘샹그릴라’라고 한다. 그 비탈길을 빠져 내려가면 사방으로 풍경이 툭 터져버리는 아름다운 분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샹그릴라’는 본래 히말라야 산맥 깊은 곳에서 생겨난 말로 ‘언덕 저쪽’이라는 뜻이다. 생로병사도 없고 빠름과 느림도 따로 없는 꿈같은 이상향을 그들은 샹그릴라라고 부른다. 살다가 내가 굴암산 산허릿길 걷듯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마치 흐르듯이 걷다보면 언덕 저쪽, 샹그릴라에 닿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곳에선 갑자기 인광으로 번득이는 눈빛이 되어 ‘걸레’를 북북 찢는 손은 최소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범신 소설가·명지대교수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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